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문단 편집) == 생애 == 1864년 6월 11일에 [[뮌헨]]에서 프란츠 슈트라우스(Franz Strauss, 1822~1905)와 어머니인 요제피네 프쇼르(Josephine Pschorr, 1838~1910)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는 바이에른 왕립 오페라단의 [[호른]] 수석이었고, 당대 최고의 호른 연주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매우 엄하고 완고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요제피네는 뮌헨의 부유한 양조업자 게오르그 프쇼르(Georg Pschorr, 1798~1867)의 딸로, 1854년에 콜레라로 며칠 만에 전처와 두 아이를 모두 잃었던 프란츠의 후처였으며, 아버지와 달리 부드럽고 교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동생인 베르타 요한나(Bertha Johanna Strauss, 1867~1966)의 생일은 오빠랑 이틀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6월 9일이었고, 무려 '''만 98세'''까지 장수했다. 친가에는 전문 음악인이 많았고, 외가에는 음악애호가가 많아 자연스레 어릴 때부터 음악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어린 리하르트의 음악 교육은 4살 반부터 시작되었는데, 슈트라우스의 첫 스승은 당연히 아버지었다. 불과 여섯 살 때에는 '재단사 폴카' 라는 곡을 처음 작곡해 신동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호른을 들으면 미소를 지었으나 바이올린 소리를 들면 울었다는 이 어린 소년은 6살에 성당의 부속 학교에 입학했고, 10살에 왕립 루드비히 [[김나지움]]에 입학했는데, 어린 슈트라우스는 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특히 역사, 고전어)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어린 슈트라우스는 아버지가 재직하던 뮌헨 궁정오페라 관현악단의 리허설도 자주 참관했고, 11살 때부터 단원들과 지휘자로부터 음악 이론과 관현악 편곡법 등을 계속 배웠으며, 11살에 아버지가 결성한 소규모 관현악단을 지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작곡가로서의 공식적 데뷔는 후에 [[파르지팔(바그너)|파르지팔]]을 초연하게 되는 헤르만 레비가 1881년 3월에 지휘한 교향곡 1번 d단조의 초연 무대였다. 1874년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탄호이저(바그너)|탄호이저]]와 [[로엔그린(오페라)|로엔그린]]을 들었지만, 그때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딱히 바그너에 대한 흥미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882년에 여름에 호른 주자로 초빙된 아버지와 함께 바이로이트로 간 슈트라우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과 파르지팔 초연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다만 아버지인 프란츠와 주변 지인들이 엄청난 반(反)바그네리안이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좋았다고 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에는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미학, 미술사를 전공하게 된다. 참고로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모차르트를 위시한 고전주의 음악을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바그너를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당시 프란츠가 소속된 뮌헨 궁정 오페라의 주인인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바이에른)|루트비히 2세]]가 열렬한 바그너의 애호가이자 후원자였기 때문에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중기 이후 작품 대부분을 초연했을 정도로 바그너를 자주 연주해야 했다. 반(反)바그네리안이였던 프란츠는 걸핏하면 자신이 맡은 바그너 작품의 호른 파트가 연주 불가능한 패시지라고 항의하여 바그너 제자들을 애먹였다.[* 그 일례로 프란츠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호른 파트는 클라리넷에나 어울릴 것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렇게 프란츠가 불평할 때에는 [[니벨룽의 반지]] 초연의 중책을 맡았던 바그너의 수제자 [[한스 리히터]]가 이런 패시지들을 본인이 직접 연주해 보이곤 했다고 한다.(한스 리히터는 호른 연주자 출신이었다.)] 그렇지만 바그너는 프란츠 슈트라우스를 '견디기 힘들지만 호른을 불면 화를 낼 수 없는 녀석'이라며 자신을 매우 싫어하던 프란츠를 염두에 두고 여러 어려운 호른 패시지들을 작곡해 나갔다. 바그너의 칭찬에도 프란츠의 바그너에 대한 반감은 굳건하여, 바그너 사망 후 추모음악회에서도 전 오케스트라가 기립하여 연주하는 가운데 프란츠 슈트라우스만 끝까지 앉아서 연주했다고 한다. 1883년부터는 [[베를린]]으로 잠깐 옮겨서 당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던 [[한스 폰 뷜로]]의 보조 지휘자로 일했는데, 뷜로가 이 후배를 좋게 봤는지 1885년에 자신의 후임으로 마이닝엔 궁정극장 음악 감독 직책을 넘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마이닝엔 재직 시절부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시인이었던 친구 알렉산더 리터(Alexander Ritter, 1833~1896)의 영향으로 점차 바그너와 [[프란츠 리스트|리스트]] 류의 '신독일파' 계열 음악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작곡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뷜로와의 관계도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뷜로도 예전에는 열성적인 [[바그네리안]]이였지만, 바그너가 자신의 부인이었던 코지마를 빼앗아가자 대번에 반바그네리안으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1894년에는 자신이 직접 대본까지 쓴 첫 오페라인 '군트람' 을 발표했지만 비평계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슈트라우스는 나중에 이 오페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가르미슈 산장 정원에다 '군트람의 묘'까지 만들어 이 슬픔을 유머로 승화했다.] 하지만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한 [[소프라노]] 가수인 파울리네 데 아나(Pauline de Ahna, 1863~1950)를 아내로 맞이하여 동년 9월 10일에 결혼까지 하게 되는 행운도 얻었으며, 보수적인 비평가들의 태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작곡과 지휘를 병행했다. 1897년 4월 12일에는 아들을 낳은 후 아버지의 이름인 '프란츠(Franz)'로 이름을 지었다.[* 참고로 이 프란츠 슈트라우스(Franz Strauss, 1897~1980)는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와 완전히 똑같은 나이인 83세까지 살았다.] 1905년에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희곡)|살로메]]를 오페라로 만든 '[[살로메(오페라)|살로메]]'가 당시로서는 극단적인 잔인함과 외설성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물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렸는데, [[폴 뒤카]]는 '이전까지는 내가 관현악법이 무엇인지 안다 생각했으나 이것을 듣고는 아직도 관현악법에 대해 알 게 많단 것을 깨달았다'고 극찬한 것과 달리, [[코지마 바그너]]는 슈트라우스가 이 오페라의 일부를 피아노로 연주한 것만 듣고 '광란'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살로메가 초연한 해에 사망한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이 오페라의 일부를 피아노로 연주한 것을 듣고는 '이리 저리 기어다니는 오월의 풍뎅이가 가득 찬 바지를 입고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이어 작곡한 '엘렉트라'는 전작을 능가하는 음악적 파격성을 보여주면서 '무서운 신예' 로 자신의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엘렉트라'에서부터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대본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은 1932년의 '아라벨라'까지 모두 여섯 편의 오페라 대본을 제공하면서 명작 오페라들의 양산에 큰 몫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독일에 득세하기 시작한 [[나치]]와 그다지 좋지는 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명성에 흠이 가기 시작했고,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성 휘하에 만들어진 '제국 음악국(Reichsmusikkammer)'의 총재로 취임하자 좌파/반나치 인사들이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와 나치의 관계는 원만하기는 커녕 계속 삐걱댔고, 호프만슈탈에 이어 새로 받아들인 [[유대인]] 대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자 총재 직책을 사임해야 했다. 이렇게 나치와 늘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독일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서 음악 활동을 했다. 종전 후에는 나치 부역 문제로 군정 측으로부터 활동 제한 조치를 받았지만, 예전부터 쌓아온 명성 덕인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80대를 넘긴 고령이었던 만큼 건강도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고, 대외적인 활동도 점차 뜸해졌다. 1947년 10월에 [[런던]]에서 지휘자로 마지막 공식 연주회를 가진 뒤에는 해외 여행도 하지 않았고,[* 이때 생활고에 시달렸던 슈트라우스는 자필 악보를 저당 잡히거나 팔아가면서 살아갔다고 한다.] 독일 최남단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자택에 칩거하며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를 비롯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기게 되었다. 1948년 6월에는 뮌헨의 탈나치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고, 1949년 7월에는 각각 영화 촬영과 방송용 녹음을 위해 '장미의 기사'의 2막 끝부분과 '카프리치오'의 간주곡을 지휘한 것을 끝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완전히 끝마친 슈트라우스는 1949년 9월 8일 오후 2시 직후에 잠을 자다가 심장 발작과 요독증으로 타계했다. 3일 후인 1949년 9월 11일에 열린 슈트라우스의 장례식에서는 '장미의 기사' 제3막의 삼중창이 연주되었다. 성이 같은 Strauss의 [[요한 슈트라우스 1세]] 가문과는 혈연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 두 사람은 각각 오스트리아, 독일 출신으로 국적도 전혀 다르고. 'Strauss'라는 단어가 '싸움'이라는 의미라 하니, 조상들 중 싸움 좀 하는 분이 계셨다는 점, 그리고 'ß'가 아닌 'ss'라는 점에서 스위스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의 공통점은 있다.[* 스위스는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에스체트]]는 사용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